대동세보 창시와 속수내력

* 제一회

서기 一五四五년(인종 원년) 개국 一五四년 을사에 좌의정 諱 『통원』께서 순천부사로 재임시 창시한 單권으로서 처음의 족보임.

* 제二회

서기 一五六二년(명종 十七년) 임술에 감사 諱 『전』께서 전주부윤으로 재임시 전주부에서 속수 간행함.

* 제三회

十六년 뒤 서기 一五七八년(선조 十一년) 무인에 청양군 諱 『의겸』께서 전라감사로 재임 중 현재 장성군의 속현인 진원현에서 증수함

* 제四회

七十一년 뒤 서기 一六四九년(인조 二十七년) 기축에 군수 諱 『장세』께서 영천(현 영주)에서 간행함.

* 제五회

六十三년 뒤 서기 一七一二년(숙종 三十八년) 임진에 보국 諱 『단』께서 대사헌으로 재임시 증수하되 발간은 못하고 이듬해 계사에 부사 諱 『득양』께서 순흥부사로 재임시 순흥부에서 간행함.

* 제六회

七十五년 뒤 서기 一七八七년(정조 十一년) 정미에 참판 諱 『기태』께서 속집을 하였으나 간행치 못하고(정초라 함) 二十三년 뒤 서기 一八一○년(순조 十년) 경오에 군수 諱 『능정』께서 속수하였으나 역시 완성치 못하고(경초라 함) 二十二년 뒤 서기 一八三二년(순조 三十二년) 임진에 판돈녕 諱 『능악』께서 속수에 착수하여 十二년째인 서기 一八四三년(헌종 九년) 계묘에 서울에서 활자판 二十七권이 준간되었으며 그 중 四권은 부속편임.

* 제七회

三十一년 뒤 서기 一八七三년(고종 十년) 계유에 판서 諱 『승택』께서 속수를 시작하였으나 간행치 못하고 서기 一八八一년(고종 十八년) 신사에 판서 諱 『이택』께서 광주(경기도) 유수 재임시 미진한 부분을 속수하여 서기 一八九三년 계사에 三十一권으로 준간함.(인수부윤공파는 합보되지 않았음)

* 제八회

三十七년 뒤 서기 一九一八년 무오에 내부협판 諱 『상익』께서 서울에서 속수하여 서기 一九二○년 경신에 二十四권으로 간행함.(인수부윤공파도 합보됨)

* 제九회

三十九년 뒤 서기 一九五六년 병신에 서울에서 청송심씨 대동세보 편찬위원회를 결성 교정 위원장인 『의성』께서 六권으로 서기 一九五七년 정유에 양장판으로 준간함.(미진한 부분과 상이점이 있었음)

* 제十회

서기 一九五八년 무술에 착수하여 서기 一九七二년 임자에 완간,무술보라 칭하고 후손 『종익』께서 서울에서 간행함.

* 제十一회

서기 二○○○년 경진에 청송심씨 대동세보 간행위원회를 결성한 후 서기 二○○二년 임오에 준간하여 경진보라 칭하고 양장판 자손록 十권과 수권 二권,색인부 一권 도합 十三권으로 대종회 『명구』회장께서 간행함.

 

인수부윤공파 세보 창시와 속수내력

* 제一회

 

서기 一八七九년 기묘 三월에 후손 통정대부 전 돈녕부 도정 諱 『면영』께서 창시 간행함.

* 제二회

 

서기 一九二一년 신유 九월에 후손 통정대부 전 비서원 비서승 諱 『원익』께서 속수 간행함.

 

충의위공파(내금위공파) 세보 창시와 속수 내력

* 第一回

서기 一九五四년 갑오에 유사 태식(泰植)께서 야음동 여천당에서 충의위공파 세보 편찬을 착수하여 서기 一九五五년 을미에 二권으로 竣刊하니 이를 『乙未譜』라 칭하고 파보로서는 처음 창시됨.

* 第二回

二十六년 뒤 서기 一九八○년 경신에 문장 종수(鍾樹)께서 오파(吾派) 세보를 속수하여 울산종문회관에서 三권으로 竣刊하니 이를 『庚申譜』라 칭함.

* 第三回

三十四년 뒤 서기 二○一四년 갑오 十월에 종회장 영구(英求)께서 내금위공파 세보 편찬위원회를 결성,응보(應輔) 편찬위원장의 주관하에 달동 종회 사무실에서 속수하여 서기 二○一六년 丙申 一월에 양장판 二권으로 竣刊하니 이를 『丙申譜』라 칭하고 충의위공파 十一世 내금위공(諱滉)의 후손만 수단하여 처음으로 二十四世(求|字 항렬) 이후부터 한글로 간행함.

 

※창시(創始)와 속수(續修)내력 : 창시는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하는 것이며 속수내력은 前譜에 이어서 수정 또는 교정 및 보완 등으로 내려오는 역사(과정)를 말함.